• 2023. 6. 8.

    by. 바디앤소울

    오늘은 6월 민주항쟁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그 후 의미들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6월에 큰 역사적 사건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6월 민주항쟁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민주화 운동 중 하나로,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1987년 6월에 일어난 이 민주화 운동은 오랜 독재국가에서 민주주의국가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됩니다.

    민주항쟁-시위
    6월 민주항쟁의 발생배경,의미 되새기기

     

    목차

     

    민주항쟁 발생 배경

    하나, 전두환정부의 독제와 민주화 운동

    1979년 10.26 사건으로 독재정치를 하던 대통령 박정희가 죽고, 새로 취임한 대통령 최규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임하겠다고 하였지만,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등을 비롯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 내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전두환이 집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시위 규모는 커졌고, 시위 참가자들도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는 이를 무력, 유혈 진압하고 , 전두환은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1987년 1월 13일 경찰은 당시 민주화 운동으로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을 잡기 위해 당시 서울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을 치안본부 대공분실 연행하였습니다.

     

    취조실에서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이 순순히 대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습니다.

     

    시체부검결과가 발표되며 고문에 의한 것이라는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이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식" 열렸고 이어서"박종철 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과 함께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셋, 4.13 호헌조치발표

    1987년 4월 13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평화적 정권 교체란 명분을 앞세워 국민의 여망이던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합니다. 호헌 조치는 그 이름 그대로 현행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오히려 국민들의 반발을 가져오게 되었고.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한열열사-추모식
    6월 민주항쟁의 발생배경,의미 되새기기

    넷. 이한열열사의 최루탄에 의한 사망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 광주항쟁 7주년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 은폐된 것을 폭로하였습니다. 이에 전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후 5월 23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합니다. 전국의 재야지도자 2,200여 명이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고, 한국 기독교장로회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고, "호헌조치 철회 및 직선 제개 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6월 9일 연세대학교 앞에서 민주화시위에 참가했던 당시 학생이던 이한열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피격당하여 큰 부상을 입고 결국 7월 5일에 사망을 하게 됩니다.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가 민주국임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이는 6월 항쟁을 임계점으로 이끈 주요한 동인이 되었습니다.

    민주항쟁-시위확산
    6월 민주항쟁의 발생배경,의미 되새기기

     

    6월 10일 민주 항쟁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18개 도시에서 가두행진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6월 10일부터 6월 15일까지 20여 일간 전국에서 연인원 5백여만 명이 참여하여 직선제 개헌 민주화 촉구를 위한 거리집회, 시위등을 계속해나갔습니다.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각 지역에서 100여만 명이라는 대 규모 인원이 참가하여 6월 항쟁 중 최대 규모를 기록하게 됩니다. 참고로 6월 항쟁이 진행 중이던 6월 19일 전두환은 군 투입지시를 내렸지만 미국의 반대로 비상조치계획과 군 출동지시를 유보하게 됩니다.

    민주항쟁홈페이지

    6월 민주 항쟁 이후

    저항운동이 대규모로 확산되자 6월 29일 노태우 민주당 대표의 6.29 시국 수습선언(직선제개헌 시국수습 특별선언) 이후. 직선제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이를 통해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완전환 정권교체는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후 전두환은 임기가 끝나고 여론이 두려워 강원도 백담사로 들어가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6월 민주 항쟁의 의미

    6월 항쟁은 시민 저항을 통해 독재정부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 비롯한 헌법의 개혁을 이루어냈으며 이후 민주화와 자유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며 민주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6월 민주항쟁은 시민항쟁이 일어날 때 내란, 폭동, 쿠데타등의 유혈사태가 많은 다른 시민항쟁과는 다르게 비교적 평화적인 시위로 군사 독재정권을 퇴출시켰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시민항쟁이기도 합니다.